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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육의 시작]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과 선교 활동의시작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04-02-24 10:10
조회 : 634
3)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내전(來全)과 선교활동의 시작


미국의 감리교와 북장로교가 불을 붙여 놓은 한국의 선교에 당시 중국, 이태리, 브라질, 멕시코, 쿠바, 희랍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던 남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는 뒤늦게 참가하였다. 북장로교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는 안식년이 되어 미국에 돌아가서 1891년 9월에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McCormick) 신학교에서 한국선교 현황에 대한 보고 강연을 하였다. 이때 당시 신학교 학생이었던 테이트(L. B. Tate, 崔義德)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해 10월에는 테네시 주 내쉬빌(Nashiville)에서 열린 미국 신학생연합 외국선교회에서 역시 언더우드가 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을 하였고, 당시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에 유학 중이던 망명객 윤치호(尹致昊)가 한국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이때 이 모임에 참석했던 맥코믹 신학교 학생인 테이트, 유니온 신학교(Richmond) 학생인 존슨(Cameron Johnson)과 레이놀드(William Davis Reynolds, 李訥瑞)는 큰 감동을 받고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또한 친구인 존슨으로부터 내쉬빌 대회의 보고를 듣고, 한국에 관한 책들을 읽었던 전킨(William McCleery Junckin, 全緯廉)은 이들과 함께 한국 선교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그들의 꾸준한 노력과 기도로 1892년 8월 남장로교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는 테이트와 레이놀드, 그리고 전킨을 한국 초대 선교사로 선정하였다. 최초로 3인의 선교사가 정해진 후 선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잇던 4명의 여성이 이에 가담하여 `조선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4명의 여성은 테이트의 동생인 매티 테이트(Miss Mattie Tate, 최마태),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정킨의 부인 리번(Mary Leyburn), 그리고 레이놀드의 부인 볼링(Patsy Bolling)이었다. 이들을 합하여 흔히 “7인의 선발대”라고 부른다.

7인의 선발대는 1892년 9월 7일 선발대의 성공을 비는 파송예배가 끝남과 동시에 미국을 출발하였다. 이들 중 데이비스 양은 1892년 10월 18일 제물포에 도착했고, 나머지 6인도 11월 3일에 제물포에 도착함으로써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처음 한국에 도착한 이들은 추위 속에서 불편한 환경을 극복해내야 했고, 언어훈련도 시급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초기활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선교연습에 불과한 것이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한 다음 해인 1893년 1월 28일 북장로교 선교사 빈톤(Dr. Vinton)의 집에서 한국에 주재하는 장로교파 선교사들이 참석하여 「장로교 미꽅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무를 처리하였는데 여기서 장차 한국 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미칠 두 개의 안건이 채택되었다.

첫째는 예양협정(禮讓協定 : Commity Agreements)의 성립이다. 즉 각 선교회가 사업의 중복과 지역의 이중 점거에서 오는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남장로교는 아직 점거되지 않은, 선교적으로 미개척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점유 개척하도록 합의를 한 것이다.

둘째는 먼저 한국에 온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정책의 기본원리로 채택했던 네비우스 방법을 근간으로 보다 구체적인 선교 정책을 공식으로 채택한 것이다.

위의 「미꽅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전라도는 자연히 남장로교의 선교 영역이 되었고, 전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내려오게 되었다. 1893년 2월 남장로교 선교회는 레이놀드 목사의 비서이며, 신실한 신자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어 선교사들을 위한 대지를 구입하게 하였다. 성밖에 집을 구입한 것은 아직까지 외국인들의 성내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해 9월 테이트 목사와 전킨 목사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전주에 왔다가 2주간 머무르기도 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전주를 산곡에 아름답게 자리잡은 5만의 인구를 가진 도시라고 표현하였다.

1894년 2월, 남장로교 선교회 제2차 정기 연례회는 테이트 목사와 그의 누이동생 테이트양을 전주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일이 잘 진행될 경우 가을에 상설 스테이션을 개설하기로 하였다. 3월 19일, 테이트 목사는 말을타고, 여동생 테이트양은 가마를 타고 서울을 출발하여 6일만에 전주에 도착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이들은 이전에 구입해 둔 초가집에 머무르면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척외사상(斥外思想)이 팽배해 있던 보수층의 사람들은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테이트 목사 남매가 거처하는 집의 대문을 부수며, 갖가지 위협을 가해 오기도 하였으나 별다른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테이트 양은 전주에 거주하게 된 최초의 서양 여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한국 여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성내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녀를 구경하러 온 4백 ∼ 5백명의 여인들과 접촉할수 있었고 , 이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정도의 간단한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테이트 목사는 그의 한국어 선생과 함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하여 안내소책자를 배포하면서 전도활동을 하러 다녔다. 마침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5 ∼ 8명이 되었는데 이 중에서 6명이 성서의 진리를 확신한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그들은 서울로 철수했다가 동학운동이 끝난 1895년 2월 레이놀드 목사와 테이트 목사가 전주에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전주에 선교부를 세울 계획이었다. 당시 전주는 전란으로 인하여 삼분의 일 정도가 파괴되어 있었고, 전에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전에 테이트 목사 남매가 거주했던 완산 언덕에서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대지와 2개의 초가집을 매입하였고, 동년 9월에 개수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정식 선교활동은 그해 12월 말경 테이트 목사의 남매가 이곳에 이사하여 상주하게 됨으로써 가능해졌다. 그리고 해리슨 목사는 1896년 11월에, 레이놀드 목사는 성서번역과 부인의 건강 때문에 1897년 6월에 전주에 도착하여 테이트 목사 남매의 선교활동에 가담하였다.

드디어 전주에 토착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세례의식이 거행되었다. 1897년 7월17일 레이놀드 목사의 설교와 집례로 5명의 신자가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김창국, 김내윤, 유씨부인(유충경의 모), 김씨부인(김창국의 모), 함씨부인 이었다. 또한 김창국의 조모와 모친은 테이트 양의 전도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전주 최초의 신자들이기도 하였다.

1897년 레이놀드 목사와 테이트 목사는 완산동 언덕에 1천5백 달러를 들여 두채의 집을 마련하여 살았는데 1900년이 되자 전주의 관리들이 그 지대는 태조의 조부가 태어난 성역이기 때문에 거주를 허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타협 끝에 정부는 선교사들이 완산동에서 철거하는 대가로 그에 상당한 땅을 다른 곳에서 대체해 줌은 물론 건물 건축시에 소용되는 비용 일체를 변상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이때 물려받은 땅이 현재의 선교사들이 거주하는 화산동 지대이다. 따라서 예배의 처소도 자연히 서문 밖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서문외교회(西門外敎會)의 실질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병원과 신흥학교, 기전학교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도 이 사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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