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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육의 시작]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04-02-24 10:11
조회 : 744
4) 신흥학교의 설립과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전주에 와 선교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들은 지방교회의 지도자를 훈련시킬 필요성을 느껴 성경학교를 열었는데, 이 성경학교는 1899년에 14명의 남자들이 입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성경학교를 열었던 이듬해인 1900년 9월 9일 서문외 완산 북림 기슭에 있는 레이놀드 목사의 사랑에서 한 소년을 대상으로 하여 근대식 교육이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전주에서 시작된 최초의 근대교육이요, 신흥학교의 출발이다. 이 최초의 근대식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당시 만 16세의 소년인 김창국(金昶國) 이었다.

1901년 전주 선교부에서는 학교 설립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했는데 다음 기록에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신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교육사업을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는(전주의 선교사들) 선교사들이 선교회가 책정한 계획에 따라 남녀학교를 하나씩 시작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01년 7월 1일, 해리슨 목사와 그의 어학선생에 의해서 8명의 남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그마한 주간학교(day school)가 시작되었다. 물론 이 학교는 그 전해부터 레이놀드 목사의 집에서 김창국이라는 한 소년을 가르쳐 왔던 교육의 연장이요,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개교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해리슨 목사는 1901년 7월 9일자로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 가정에서 온 소년들을 위해 학교가 문을 열었다. 학교를 여는 문제에 대해서 부모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이에 대하여 부모들은 학교가 시작하기 전부터 8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보내 주었다. 그들 가운데는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 몇몇 어린애들도 있었다. 우리들은 건물과 책, 그리고 유능한 교사 등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이 부족하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신흥학교는 전주에서 최초로 시작된 기독교 가정의 소년들을 중심으로 한 근대 교육기관이었으며, 새로운 근대식 교육에 어린 학생들은 매우 큰 기대를 가지고 배움에 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최초의 신흥인이었던 김창국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작업을 통하여 선교사들이 심은 선교와 교육의 씨앗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김창국(金昶國) 목사는 1884년 1월 28일 전주에서 한의원인 김제원(金濟元)씨의 二男으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는 9년간 사숙(私塾)에서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의 조모와 모친이 선교사 테이트양의 전도로 전주 최초의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도 일찍부터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 그는 당시 선교사인 테이트 목사의 사동(使童)으로 있으면서 주일날에는 해리슨 목사와 레이놀드 목사의 부인이 경영하는 주일학교에 참석할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책임을 맡아 봉사하였고,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소학교(최초의 신흥학교)에 출석하면서부터는 선교사들을 도와 장날마다 시장에 나가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등 전도활동에 힘썼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1897년 7월 17일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5명의 신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때 그의 나이 만 13세였다. 1900년 9월 9일에는 레이놀드의 사랑방에서 전주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함으로써 그는 최초의 신흥인이 되었다. 그는 주로 해리슨 목사의 부인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선교사 테이트양은 그를 아주 훌륭한 아이(good child)라고 평하고 있다.

그 후 그는 해리슨 부인의 주선으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1907년에 졸업을 하였다. 그 후 그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평양 신학교에 진학하여 1915년에 졸업함으로써 호남 지방 최초의 신학교 졸업생이 되었으며, 그 해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이전에 여러해 동안 교단에 서기도 하였는데 군산에 있는 영명학교(永明學校)에 3년간 근무 한 적이 있으며, 금산(金山)에 있는 심광학교(心光學校)에서도 3년 동안 근무하였다. 기전 학교에 졸업생이며,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인 임영신(任永信)여사는 심광학교 재직중에 가르친 제자이다. 또한 그는 1910년부터 전북 익산시에서 4년간 전도사로 시무 하였으며, 1915년 목사가 된 후에도 익산시에서 네 교회를 맡아 2년간 봉직하였다.

1917년 전라노회는 그를 제주도 전도목사로 임명하였으며, 이로부터 6년 동안에 걸쳐 김창국 목사는 제주도의 전도에 심혈을 기울여 제주도를 복음화 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제주내도리교회(濟州內都里敎會), 삼양리교회(三陽里敎會) 등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22년에는 광주 남문외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하다가 1924년 광주 양림교회(楊林敎會)를 창설하여 25년간이나 이 교회에서 봉직하였다.

그는 1918년, 1928년, 1935년에 3차에 걸쳐 전남 노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49년 3월 16일에 전남노회 주최로〈金昶國 牧師 聖役 四十週年 紀念式 및 功勞牧師 推戴式〉이 광주 남부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전국 각지에서 102회에 걸쳐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김창국 목사는 광주의 초대 YWCA회장을 역임한 부인 양응도 여사와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현정(金顯晶)씨는 평양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서 일생을 마쳤고, 차남 김현승(金顯承)씨는 숭전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시인으로도 유명한 분이었다. 3남 김현택(金顯擇)씨는 신흥학교 지정 2회 졸업생으로 전북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미국에 살고있다. 4남인 김현구(金顯求)씨는 전남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았으며, 광주 중앙교회의 장로로 시무중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김창국 목사의 자손은 모두 86명으로 그 중 40명은 미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주지방에서 처음으로 근대교육을 받은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목사의 생애와 그 가족들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전주땅의 개화의 물결과 함께 기독교가 들어오고, 그 복음의 씨앗이 교육이라는 토양 위에 심어져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를 우리는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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